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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 도종환 본문

읽고보다/메모하다

길 - 도종환

자그니 2007. 7. 5. 13:43

아무리 몸부림쳐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자정을 넘긴 길바닥에 앉아
소주를 마시며 너는 울었지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다시
올라가는 길밖에 없을 거라는 그 따위 상투적인 희망은
가짜라고 절망의 바닥 밑엔 더 깊은 바닥으로 가는 통로밖에
없다고 너는 고개를 가로저었지
무거워...
더이상 무거워 지탱할 수 없는 한 시대의
깃발과 그 깃발 아래 던졌던 청춘 때문에
너는 독하디 독한 말들로 내 등을 찌르고 있었지
내놓으라고 길을 내놓으라고
앞으로 나아갈 출구가 보이지 않는데
지금 나는 쫓기고 있다고 악을 썼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희망이 있는 것이라는
나의 간절한 언표들을 갈기갈기 찢어 거리에 팽개쳤지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던지는 모든 발자국이
사실은 길찾기 그것인데
네가 나에게 던지는 모든 반어들도
실은 네가 아직 희망을 다 꺾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것마저도 너와 우리 모두의 길찾기인데
돌아오는 길 네가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던
안타까운 나의 나머지 희망을 주섬주섬 챙겨 돌아오며
나도 내 그림자가 끌고 오는
풀죽은 깃발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네 말대로 한 시대가 네 어깨에 얹었던 그 무거움을
나도 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고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도대체 이 혼돈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너는 내 턱 밑까지 다가와 나를 다그쳤지만
그래 정말 몇편의 시 따위로
혁명도 사냥도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던 한 올의 실이 피륙이 되고
한 톨의 메마른 씨앗이 들판을 덮던 날의 확실성마저
다 던져버릴 수 없어 나도 울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네 말대로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 네 말대로 무너진 것은
무너진 것이라고 말하기로 한다
그러나 난파의 소용돌이 속으로 그렇게 잠겨 갈 수만은 없다
나는 가겠다 단 한 발짝이라도 반 발짝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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