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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도종환

자그니 2012. 9. 26. 02:08

보름 전 주말, 도쿄 코엔지에서 피아노님을 만나 돌아다니다가, 피아노님이 먼저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근처를 어슬렁 거리던 중이었다. 누군가의 집 앞에서 피어난 이 꽃을 보았다. 촛점이 잘 맞춰지지 않아 이리저리 카메라를 돌려가며 찍다 일어서서 가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부른다.


마른 체형에 안경을 쓴, 자전거에서 막 내린 중년 여인이었다. 괜찮다고. 계속 이 꽃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보니 그 집의 주인이었다. 사진 찍느라 집중해서 몰랐는데, 자전거를 타고 내 앞을 지나갔나 보다. 그래서 내가 일어났다고 생각했나보다. 이럴때 일본어로 어떻게 얘기해야할지 몰라서, 그냥 도모-하고 돌아섰다.


그래도 고마웠다. 이 꽃의 사진을 계속 찍어달라고 말해줘서. 찍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찍어도 괜찮다는 허락이 아니라, 찍어달라고 부탁을 해줘서. 




* 결국 내 GF1은 이 녀석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그래서 그날 밤, 아키하바라로 달려가서 펜탁스 K-01을 사버렸다.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녁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깍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도 크고 먼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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